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드릭 페르부르트 (문단 편집) == 최후 == [[파일:Verwoerd_geskiet.jpg]] [[1966년]] [[9월 6일]], 그 날은 [[케이프타운]]의 의회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예정대로 오후 2시 15분경 의사당에 나왔는데, 개회 종이 울리자 제복을 입은 연락원이 다가왔다. 연락원이 왜 왔는지 궁금했던 그는 연락원에게 사유를 물어보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바로 그 때 연락원이 [[흉기]]를 휘두르며 [[죽창|페르부르트의 이곳저곳을 찔러 댔다]].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가 깜짝 놀랐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중에 65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사망했다. 향년 64세. || [[파일:Dmivcz4W0AAHzlt.jpg|width=100%]] || [[파일:Dimitri_t.jpg|width=100%]] || 둘 모두 같은 인물이다. 왼쪽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체포 직후 찍힌 사진. 사태 이후 연락원은 곧바로 체포되었는데 이름은 [[디미트리 차펜다스]]로 [[포르투갈인]]과 [[그리스인]]의 혼혈 '''[[백인]]'''이었다. 법적으로야 문제가 없던 백인이었지만 그의 집안에는 사실 [[흑인]]의 피가 있었고 이것은 외모에 그대로 나타났다. 이를 이유로 백인들은 그를 [[왕따|따돌렸고]], 결국 이런 멸시와 천대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분노가 인종차별 정책의 [[만악의 근원]]인 페르부르트에게 향한 것. 이 사람의 삶도 평범한 삶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부터가 [[아나키스트]]로 [[그리스 왕국]]에 반대해 왔고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 [[모잠비크]]를 오가면서 바쁘게 살아 왔다. 미국에서 항만노동자로 일하면서 흑인들과 같이 [[미국 공산당|공산당]] 활동도 하다가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포르투갈에서 모잠비크 독립 세력을 돕기도 하고 그리스에서는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한 폭탄 테러를 돕는 등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백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공에서 살면서 백인으로 표기된 신분 증명서에 자신은 백인이 아닌 컬러드, 유색인이라고 고쳐 달라는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후에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하면서 [[정신병]]이 확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지 않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원래 정신병이 있으면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 차펜다스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지던 때에도 살아 있었으나 세상에서 잊힌 채 계속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199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차펜다스가 믿던 [[그리스 정교]] 장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사제가 미사를 보았다. 죽을 당시 고작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펜다스가 정말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암살 직후부터 논란이 거셌다. 일단 차펜다스 본인이 살아 온 인생을 봐도 그냥 미쳐서 벌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에서 공산당 및 사회주의 입당, [[권위주의]]나 독재에 저항하는 모임에 들어가 암살도 참여하고 차펜다스 본인은 사전에 페르부르트에 대하여 조사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암살했다. 그래서 차펜다스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미쳤다고 조작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 데이비드 프랫의 암살 미수 때도 남아공 정부는 미친 사람의 범행이라 발표하면서 프랫을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었다.] 차펜다스도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미쳤다고? 벌레가 그 놈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웃기는 소리다." 라고 부정했으며 죽는 날까지 백인들은 멀쩡한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차펜다스가 수감 중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도 논란이 되었다. [[2018년]]에 남아공에서 그가 미쳐서 벌인 짓이라고 발표한 사건 당시 백인 조사원들이 서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미개한 검둥이 같은 그를 정밀 조사할 거 없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태도로 서술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뒤 남아공에서도 백인 정권이 그를 일부러 미쳤다고 비하하며 진짜 동기를 감췄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재평가되었다. 페르부르트가 살해당하자 서방의 일부 국가들은 애도를 표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들도 페르부르트를 매우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페르부르트 때부터 남아공에서 공안정국과 언론 검열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었고 '''백인들마저 숨막혀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를 위시한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인과응보|그야말로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고 한다]]. 흑인들에게는 정말로 불구대천의 철천치원수가 따로 없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https://www.vivmag.co.za/archives/10294|남아공 현지인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 [[http://egloos.zum.com/epoque/v/3494140|페르부르트의 암살과 각국의 반응]] 페르부르트 사후 남아공의 독재는 좀 완화되는 듯 싶었으나 발타자르 포르스터 정권 이후에도 독재와 인종차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페르부르트의 이름은 각종 시설물에 붙으면서 [[우상화]]되었다. 당연하지만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사라지며 그의 우상화는 모두 다 철회되었고 지금은 소수 정당에 지나지 않는 백인우월주의 정당에서나 찬양할 뿐이다. 한편 차펜다스는 억울하게 정신이상자로 매도되었다고 [[재평가]]되면서 [[2000년대]] 와서 그를 기린 연극이나 그를 다룬 책도 나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